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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 이승만 추모식 참석 감격

멋진기레기굥 발행일 : 2023-07-20

이승만 초대 대통령 제58주기 추모식에 참석한 뒤 "정권 교체를 가장 크게 실감했다"며 감격에 겨운 글을 남겼습니다.

 

나경원, 이승만 추모식 참석에 감격

나경원 이승만대통령기념사업회 부회 

나경원 전 국회의원
나경원 전 국회의원

박민식 보훈부장관, 국민의힘 최재형, 탈북 국회의원 태영호 의원,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 박사와 나란히 1열에 자리했던 나 전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오랫동안 이승만 대통령 서거일은 늘 아쉬움이 남는 추도식이었다"며 문재인 정부 시절 홀대받았던 것을 회사 하는 듯한 글을 남겼습니다.

 

이어 "하지만 이제 비로소 윤석열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로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고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며 "문 정권시절 자유민주주의 궤멸과 종전선언에 맞섰던 그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다행이라 생각한다"고 종전을 거부한 자신의 활동이 옳았다고, 전쟁을 통한 북진통일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신을 이어받아 전쟁을 통한 북진 통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듯한 글을 남겼습니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 바로 세우기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기 위한 것"이라며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국가의 정체성이고, 그 정체성을 세운 분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추모했습니다.

 

 

https://youtube.com/v/idbhQx10-9A

 

이승만 그는 어떤 사람인가?

위싱턴 포스트지 나 호놀룰루 신문에 기소된이승만의 글
위싱턴 포스트지 나 호놀룰루 신문에 기소된이승만의 글

 

기밀문서였으나 해제된 미국 CIA 이승만 인격 조사 문서에는 '이승만은 사적인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승만은 카쓰라 태프트 밀약 이후 우호적인 미일관계를 이용하여 일본을 찬양하는 글들을 자주 썼으며.(위싱턴 포스트지 나 호놀룰루 신문에 기소된이승만의 글을 인용하기 바란다)  더불어 미국의 비위를 맞추었다. 이와 별도로 한인들 앞에서는 독립을 열거하며 철저히 이중적인 삶을 산다.

 

전명운·장인환의 '스티븐스 사살 사건' 에서 이승만

‘일본의 한국 지배는 한국에 유리하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은 스티븐스를 처단한 장인환과 스티븐스 저격에 나섰다가 권총 불발로 실패한 전명운에 대하여 샌프란시스코  장인환 후원회에서  이승만에게 통역을 부탁한다.

 

우선 교민들은 전명운 장인환의사를 구명하고자, 당시 하와이 바나나농장에서 어렵게 일한 동포들이 정말 목숨 같은 돈을 모은다. 

애국지사를 죽일 수 없다는 '애국심'에서 동포애가 발휘된 것이다. 그러나 동포들 중 아무도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가 없었고 황색인종을 도와줄 백인은 없었다.

 

다행이 하버드 '석사'요, 프린스턴 대 철학박사인이승만을 찾아갔고, 이승만은 수락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1등급 호텔에서 자신이 머물게 해 달라는 현실에 맞지 않는 조건을 내세워 교민들은 모금한 그 피 같은 돈으로 그의 조건을 들어준다. 그러나 이승만은  돈만 쓰고 시간만 허비하다, 마지막엔 나는 살인자를 변호하는 통역은 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기고 도망친다. 

 

안중근 의사에 대한 이승만

이승만은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에 대하여 나라의 명예를 더럽힌 암살자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또한 국내 의병투쟁까지도 어리석은 짓으로 비판하는 발언을 거듭했다. 

 

일본과 같은 강대국을 군사적으로 저항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며 장인환·전명운의 변호 통역을 하지 않은 것 역시  무장독립노선을 부정하는 이 승만의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승만의 야심 과 비열한 욕망

그의 야심이 드러난 것은 1919년 3월 1일 고국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3. 1 운동이 일어나자 그를 따르는 교민들을 규합하여 "필라델피아' 독립기념관에서 열린 한인대회에서 "한국이 일본에 합병된 뒤에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독립운동을 획책한 적이 없다.라고 발언한다.

 

그러면서 한국독립은 국제연맹에 "청원서"를 내고 "위임 통치를"받은 후에 해야 할 일이며, 독립이 된다면, 반드시"미국식"민주주의를 표방할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승만은  가장 양심적 평화를 사랑하는 박애주의자처럼 2박 3일간 미국각지에서 몰린 교민들을 기만하며 치렀다. 이날 이승만은 미국의 신화 같은 초대대통령 "워싱톤이 앉았다는 의자에 앉아 건방을 떨며" 새한국의 초대대통령이 자신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며 대통령 취임식까지 했다. 

 

이때는  이미 임시정부의 직함인"대통령"직을  탄핵당하여 아무것도 아닌 신분인데도 "임정의  대통령"직함을 그냥 사용했다. 이것은 분명한 사기인 것이다. 마치 그의 행위는"그리스신화"의 기회의 신 "카이로스"를 연상시켰다.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 시절 불륜으로 기소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결성되고 이승만을 잘 모르던 기독교(평양, 서울) 출신 임정요인들에 의해 대통령으로 추대된다.

이때 이승만은 임시정부 명의로 채권을 발행하고 미 전역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순회를 하였다.

 

명목은 활동이었지만 순회 시 젊은 여성을 항시 동석시겼고 모금한 독립자금으로 자신의 향락을 즐겼다. 그러던 이승만이 미경찰에 체포된다. 많은 여성들과 불륜에 가까운 행적을 이어가던 그에 대한 진정이 받아들여졌고 주 법률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기소되기에 이르렀다.

 

하와이에서 재판을 받기를 요청해 승낙을 얻은 다음 독립자금을 뇌물로 쓰며 하와이 미 유력자들을 포섭 유효한 증언을 얻고 풀려나게 된다. 

 

이승만 탄핵

대통령 추대 1년 만에 임시정부 상해를 방문하여 독립군 강경투쟁을 기피하며 모든 의견들을 묵살한 채 연두교시를 통해 때를 기다리자는 말로 얼버무리게 된다. 이에 이승만 지지하던 임정 의정원도 등을 돌리고 탄핵,  권한중지카드를 꺼내 들었다. 화가 나 미국으로 돌아온 이승만은 상해 임정으로 보내지는 독립자금을 끊어버렸다.

 

이승만은 한인들이  모아준 자금의 13%만 임정으로 보내고 나머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해 왔다.
이승만과 임정의 지루한 싸움이 계속되었고 상해 임정에서 이런 이승만의 횡포에 당시로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을 리도 없고 이동도 불편했으니 자연 임정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이승만 독립성금 13%만 임시정부로 송금
이승만 독립성금 13%만 임시정부로 송금

김구의 등장

이승만으로 인해 한동안 침체된 독립전쟁이 김구가 등장으로 바뀌게 된다. 김구는 일본에 직접적인 타격을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대한애국단을 조직하게 된다. 1931년부터 일본을 직접 타격하는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폭탄의거가 이어진다.
폭탄의거에 감복한 중국 장개석은 임정을 본격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한 반면 이승만은 이때도 어리석은 짓 작작하라며  임정을 비난했다.

 

이승만의 처세

이승만은 독립운동 주류로부터 점차 소외되자 다시 자신의 지위를 다지기 위해 맥아더와 접촉하게 된다. 국내침공작전을 계획하던 중 일본이 항복아자 강대국들은 한반도 분할을 모의하고 이승만은 맥아더에게 더 적극적인 구애를 한다. 1945년 10월 마침내 일본에 주둔군 사령관으로 있던 맥아더를 만나러 이승만이 도코로 가게 된다..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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