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50만 동포 정신적 지주 ‘홍범도 장군 논란’에 충격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동포들은 '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동포들은 ‘홍범도 장군 공산당 이력이 문제면 내 가족과 고려인 동포 50만 명도 모국의 적인가’, ‘항일독립전쟁 영웅 홍범도 장군 모셔갔으면 제대로 모셔라’며 육사의 결정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고려인 50만 동포 정신적 지주 ‘홍범도 장군 논란’
홍범도 장군 평전
홍범도 장군 평전을 집필한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는 정부가 고려인들의 목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말하고, 리 류보피 카자흐스탄 국립아카데미 고려극장 예술감독은 “체제와 정권이 바뀔지라도 홍범도 장군은 우리 민족의 독립전쟁 영웅”이라며 “8000만 겨레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도록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카자흐스탄 지회장
박 드미트리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카자흐스탄 지회장은 “홍범도 장군이 아름다운 해방된 조국의 품에 안겨 영면하시겠다고 생각하면서 마음 뿌듯했고 한국이라는 나라를 자랑스럽게 느꼈다”며 “카자흐스탄 국민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다섯 분의 독립전쟁 영웅 중에서 홍범도 장군 흉상만 철거한다는 소식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라고 합니다.
특히 박 드미트리 지회장은 “그렇다면 공산당원이었던 돌아가신 나의 부친도, 옛 소련에서 태어나고 인생의 절반 정도를 소련 체제 속에서 살았던 나도 제거 대상인가”라면서 “21세기에 공산당도 소련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은 지 30년이 넘었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영남대 명예교수 이동순은 최근 SNS를 통해 카자흐스탄의 감독 리 류보피가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다고 전하였다. 이 교수는 홍범도 장군의 삶에 대한 평전 '민족의 장군 홍범도'를 집필한 작가로서 리 류보피 감독과도 카자흐스탄에서 만나 직접 대화한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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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의 모든 고려인들이 철거 대상인가
리 감독은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중 많은 이들이 구소련 시절 공산당원으로 활동했는데, 그 이유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한다면 카자흐스탄의 모든 고려인들이 철거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냐"며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또한, 한국에서의 홍범도 장군에 대한 소식에 충격을 받아 "홍범도 장군을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되돌려 보내달라"며 비판했다.
이 교수는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홍범도 장군을 "고려인의 정신적 지주"로 칭하며 그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홍범도 장군의 카자흐스탄 묘소는 신혼부부들이 사랑을 지키기 위한 기원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육사는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육사 내에서의 흉상 위치를 변경하기로 결정하였다고 밝혔다. 이에 이 교수는 "리 류보피 감독의 비판을 반영하여 정부는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국방부가 제기한 의혹
자유시 참변, 그리고 홍범도 장군
자유시 참변은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현재 스바보드니)에서 독립군과 레닌의 적군(赤軍)이 교전한 사건"을 의미합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기술된 정의 그대로입니다. 볼셰비키 적군과 교전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독립군이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희생됐다는 것, 그런데 홍범도 장군이 바로 이 볼폐비키 적군 편에 서서 독립군 몰살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국방부가 제기한 겁니다.
<자유시 참변 정리>
① 1921년, 연해주 지역의 일본군 탄압이 거세지면서, 점 조직처럼 움직였던 우리 독립군도 힘을 합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러시아 한인 사회에서 임시 정부 역할을 했던 '대한국민의회'는 연해주 각지의 한인 무장부대들이 자유시로 집결하도록 지도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도 자유시에 주둔하게 된다.
② 하지만, 독립군 내부에 계파 갈등이 생긴다.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갈등이 대표적이었다. 고려혁명군정회의(이르쿠츠크 파)는 러시아의 한인 정부를 자처했던 대한국민의회, 사할린의용대(상해파)는 상해 임시정부의 연장선에 있었다. 양군의 팽팽한 대치 상황 속, 형세는 고려군정의회가 우위를 점하기 시작한다.
③ 이르쿠츠파의 뒤에는 볼셰비키 적군이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일본은 볼셰비키 적군에게 독립군 해체를 요구했다. 일본군을 철수시킬 필요가 있었던 볼폐비키 적군은 일본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독립군을 볼셰비키에 흡수하는 식으로 마찰을 피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
④ 독립군 내의 계파 갈등, 여기에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이 맞물리면서, 6월 27일 밤 고려군정의회 지도부는 사할린의용대(상해파)의 강제 무장 해제를 결정하고, 다음날 공격을 시작한다. 희생자 규모는 제각각이지만, 최소 36명, 최대 550명이 사망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홍범도 장군이 자유시 참변 무관 증거 수두룩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에 가깝다는 겁니다.
정세윤 연구원은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본 군대는 허재욱 장군이 주도하는 의군부 독립군인데, 허재욱 장군은 홍범도 부대와 크게 활약한 부대였다. 자유시 참변으로 우리 독립군이 희생됐다는 소식을 들었던 홍범도 장군은 장교들과 솔 밭에 모여 땅을 치며 통곡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오히려 참변 6개월 후 전모를 파악한 홍 장군은 사건에 대한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탄원서를 소련 정부, 러시아 공산당, 국제공산연맹 측에 제출한 사실입니다.
홍범도 장군이 상해파를 처벌하는 재판에 참여한 것은 당시 홍범도 장군은 (자유시 참변에 관여하지 않았던 까닭에) 정세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르쿠츠크파를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던 공산당 극동비서부장 슈미야츠키는 이런 홍범도가 재판에 들어가길 바랐고, 당시 상황에 대한 지식이 없었던 홍범도가 수락했던 것입니다.
범도 장군이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 대표대회에 참석 당시 홍범도 장군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작성한 조사표가 발굴됐는데, 소속 정당도, 소속 노동조합도 '없다'고 적었고, 꿈은 '고려 독립'이라고 썼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1922년 고려군 혁명군에서 제대하고, 1923년에 제대 군인들과 함께 연해주 이만에서 협동농장을 이끌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나이로 60세인 1927년 공산당에 입당했습니다.
1937년 9월, 소련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공화국 사나리크로 이주했으며, 이듬해에는 카자흐스탄의 소도시 크질오르다에 정착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1943년 10월 25일 75세를 일기로 서거했습니다.
봉동동 전투와 천산리 전투 빨치산으로 참가 의혹
1920년대의 빨치산은 우리가 아는 빨치산과 개념 자체가 달랐습니다. 오세호 전 연구원은 "빨치산은 프랑스어로 '동지' 또는 '당파'라는 뜻의 'parti'에서 유래된 말로 비정규군을 의미한다. 홍범도를 비롯한 1920년 독립전쟁에 참전한 독립군들은 정규군이 아닌 '의용병'이나 '빨치산'으로 참가한 것을 6.25 이후 빨치산과 동일시한 오류입니다.
1920년대 공산주의와 남자 친구 한 김일성 공산주의
국방부의 각론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 공간의 공산주의, 그리고 1945년 이후 해방 공간과 한국전쟁 공간의 공산주의를 동일하게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독일 등에 맞서 한 편에 서 있었고, 2차 세계대전 승전 이후 체제 경쟁이 시작된 당시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야 상식이라는 겁니다.
달리 말하면, 역사를 소급 적용하는 오류에 가깝다는 겁니다.
우리는 "세종대왕이 행정권은 물론 사법권까지 장악했기 때문에 독재자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1950년대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20년대의 시대적 상황에 끼워다 맞추다 보니 무리한 주장이 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인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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