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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공산당 가입 및 혈서로 일본에 충성 맹세하고 장교 생활

멋진기레기굥 발행일 : 2023-08-28

박정희 공산당 가입 및 혈서로 일본에 충성 맹세하고 장교 생활

박정희와 만주국육군군관학교의 연결고리

박정희 일본군관학교 졸업식
1942년 3월 24일, 만주일보


박정희는 일제강점기 교사로 취업했습니다. 교사로서의 일상을 누리던 박정희는 어린 시절부터 군인이 되고자 하는 꿈과 함께, 교사로서 겪는 차별과 가족의 문제 등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러던 중 1938년, 21세의 나이로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 1기 지원을 결심합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나이 문제로 탈락하게 되었습니다.

동료인 유증선 선생의 조언으로 박정희는 면도칼로 손가락을 베어 그 피로 '혈서'를 작성하여 제출했습니다. 이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1939년 3월, 그의 혈서는 만주신문에 실렸고, 그 신문 기사를 본 그의 고향 선배이자 조선인 출신의 만주군 대위 강재호가 후원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혈서로 충성 맹세로 입학과 수석 졸업

혈서로 맹세

이러한 지원 덕분에 박정희는 10월에 군관 선발 시험에 참여하여, 합격자 240명 중 15등의 성적으로 만주국육군군관학교 2기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 1942년, 박정희는 타카기 마사오라는 이름으로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의 우수한 성적에 힘입어,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금장시계와 일본육사 유학생대 편입 특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전통에 따라, 박정희는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진학하여 1944년에 3등의 성적으로 졸업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수습군관으로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일본육사 졸업 후 박정희의 활약

만주국 포스터

1945년 7월, 박정희는 황군 육군 소위로 "만주군 제6군관구 소속 보병 제8단"의 소대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해 7월 말과 8월 초에는 제8단의 2개 대대와 일본군이 합동으로 중국 팔로군을 공격하는 작전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정받는 엘리트로서의 그의 능력은 금세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1944년 12월 23일에는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서 작전참모 역할을 하며, 부대의 단기를 책임 관리하는 중요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 7월에는 중위로 진급하였습니다.

1945년 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으로 진출하여 소련군의 진격을 막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한 후, 박정희는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해임 및 무장해제당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패망 후 광복군으로 다시 포병으로

히로시마 원자폭탄

이후, 박정희는 신현준, 이주일과 함께 베이징으로 건너가,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가 지휘하는 제1대대(평진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군 생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46년 4월, 평진대가 해산되자 그는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1946년 9월 귀국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해 3개월 단기 과정을 마치고 남조선국방경비대 포병 소위 계급을 부여받습니다.

 

남로당 군사총액으로 활동하며 국간전복 시도

여순사건

박정희의 군인 생활 중 가장 험난했던 시기로 떠오르는 것은 그의 형 박상희의 죽음과 그와 관련된 남로당 활동일 것이다.

셋째 형 박상희는 공산주의자로 대구 10.1 사건과 관련하여 경찰에게 사살당하였다. 그의 죽음은 박정희의 정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박상희의 친구였던 이재복은 박정희 가족과 매우 가깝게 지내왔으며, 박상희의 죽음을 계기로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끌어들였다. 그런 과정에서 황태성이 박정희의 신원 보증을 맡았다.

박정희는 남로당 활동 중 정부전복 기도사건을 지도,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에서 감행한 가장 큰 규모의 사건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48년 11월 11일, 김창룡의 주도하에 숙군 작업이 진행되면서 박정희는 여수·순천 10.19 사건과 연계되어 체포되었다.

 

박정희 리스트와 만주군관학교 동문들

박정희는 수사 과정에서 군 내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제공하며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다. 이를 통해 처음에는 사형 판결을 피하고 파면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는 징역 10년으로 감형받았다.

그러나 그의 군 생활은 여기서 종료되지 않았다.

만주육군군관학교 출신의 군인들의 도움으로 처벌을 면하게 되었으며, 군 내에서 다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들이 백선엽과 김창룡이다.

 

 

'박정희 리스트'로 고구마 캐듯 수사김창룡이 '구명'제안, 백선엽이 결심

[실록 '군인 박정희'-친일과 좌익의 기록 3] 누가 살려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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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 소령이 차트를 펼쳐 보였다. 남로당 군사조직표가 그려져 있었다.(중략) 박원석 대위는 맨 끝에 이름이 올라 있었는데, 바로 그 위에 박정희 소령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116p)

박원석이 공산주의자라는 것도 당혹스러운데, 그 위가 바로 박정희 소령이라 하니 더욱 더 황당한 일이었다.(중략)그래서 김창룡에게 물었다. "박원석 대위가 박정희 소령의 세포라고 하는데, 박정희 소령도 내가 보기엔 빨갱이와 아무 관련 없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는 빨갱이인 것이 확실합니다." 김창룡은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118p)

(중략)김창룡이 간 뒤 채병덕 육군참모 총장이 내게 “김창룡이가 말하기를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풀어줄 길은 있다고 하는구먼...” 한 가닥 실마리가 풀려가는 소리였다. (중략) 방첩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잡으러 갈 때 10번만 박정희를 앞세우고 얼굴을 내비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첫째, 박정희 소령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기에 협력하여 누명을 벗을 것이요, 둘째, 설사 그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10번이나 그들에게 반역을 하게 되면 공산주의자들 세계에서 영원히 추방되고, 그 결과 확실하게 전향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121p)

-  '김정렬 회고록' 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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